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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소개

6월총행복포럼

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

 

2020년 6월 총행복포럼이 17일 오후 7시, 서울 중구 대한민국시도지사협의회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하수정 북유럽연구소장이 ‘스웨덴이 사랑한 정치인, 올로프 팔메’를 주제로 한 시간 반 가량 강연했다. 강연 내용을 녹취해 소개한다._편집자

안녕하세요. 하수정입니다.

올로프 팔메는 제게 아주 애착이 있고 특별한 주제입니다. 마침 지난주 수요일에 올로프 팔메 암살사건에 대한 수사 종결 기자회견이 있었어요. 제가 사실 이 강의를 아무데서나 하지는 않는데요(웃음) 오늘 특별히 준비했습니다.

15년 전에 스웨덴 사람들을 대상으로 존경하는 사람들을 물었을 때 1위가 누구였을까요. 넬슨 만델라였습니다. 2위는 ‘엄마’였고, 3위가 올로프 팔메였습니다. 제가 스웨덴에서 공부하면서 스웨덴과 한국이 가장 다른 점이 뭘까, 생각하다가 제 나름의 결론을 내린 것이 정치와 교육 분야였습니다. 그런데 스웨덴은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나라이기 때문에 개인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하는 문화가 아닌데, ‘정치인 중에 어떤 사람?’ 하고 물었을 때 사람들이 뽑은 것이 올로프 팔메였고, 거기서부터 제 호기심과 조사가 시작됐습니다.

올로프 팔메는 1927년생이고요, 1986년에 암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리고 총리를 역임한 것이 1969년부터 76년까지 한번, 82년부터 86년까지 한 번, 이렇게 두 번 했는데요, 그 사이에 팔메가 바꿔놓은 것이 많습니다. 제가 팔메의 업적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암살사건을 매개로 해서 팔메의 업적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1986년 2월 28일,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수사종결이 지난 주에 됐으니 팔메가 암살된 지 34년이 됐습니다. 그날로 돌아가보면, 1986년 2월 28일 금요일이었어요. 팔메는 수상으로서 총리 일을 하고 6시에 퇴근했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6시 30분. 팔메의 아내인 리스베스 팔메가 영화를 보러가자고 합니다. 막내 아들과 그의 여자친구와 함께 영화를 보러가기로 하고, 극장으로 향한 게 저녁 8시. 8시 30분에 극장에 도착해서 손수 표를 사고 영화를 봅니다. 그때가 밤 9시. 영화를 보고 나온 게 밤 11시고요. 아들 내외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헤어진 게 11시 15분. 전철을 타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밤 공기가 좋아서 전철 한 정거장을 아내와 걷기로 해요. 걷다가 5분쯤 지났을 때 뒤에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 팔메에게 총을 쏩니다. 한 발을 더 쐈는데 아내는 스치듯 맞아서 다행히 리스베스 팔메는 생명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범인은 달아나요. 그때가 11시 21분이었습니다. 목격자가 있었어요. 지나가던 여자 두 명. 차 안에 있었고 간호사 견습생이었는데 총소리는 못 들었지만 사람이 쓰러지는 걸 봤고 응급처치를 하려고 뛰어갔죠. 심장마사지를 하는데 입에서 피가 쏟아져나오는 거예요. 급히 앰뷸런스를 불러요…2분이 지났을 때 택시기사가 그 장면을 목격하고 신고합니다. 택시기사들끼리 무선으로 연결이 돼 있었던 모양이예요. 이 사람이 신고하는 걸 듣고 옆에 있던 택시기사가 지나가던 경찰차에 신고해서 경찰차가 도착한 것이 사건이 발생한지 5분 후. 앰뷸런스도 5분 후에 함께 도착합니다. 그리고 앰뷸런스에 싣고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간 게 사건 발생 10분 후. 11시 31분에 병원에 도착하죠. 도착을 했지만 이미 사망상태였고, 45분 후인 0시 16분에 사망선고를 하고 그 15분 후에 후임자인 잉그바르 칼손이 (총리직을) 이어받게 됩니다.

단순한 사건인데 생각보다 복잡해지기 시작했어요. 목격자도 여러 명이 있어요. 그런데 왜 사건의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을까. 용의자를 한 명씩 따라가 볼게요.

 

용의자 1. 스웨덴의 극우주의자들

스웨덴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가문이 있어요. 발렌베리인데요. 이 가문이 갖고 있는 스웨덴 기업의 주식을 시가총액으로 따지면 스웨덴 전체 시가총액의 40%가 된다고 해요. 그런데 팔메 가문이 150년 전까지만 해도 이 발렌베리와 견주던 가문이었어요. 발렌베리 가문처럼 팔메 가문도 금융업으로 시작했습니다. 발렌베리 가문은 사업을 계속했고, 팔메 가문은 정치에 뛰어든 거죠. 그래도 팔메는 여전히 막대한 부를 보유한 가문입니다.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팔메는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고 5개국어에 능통한 엘리트로 자라났습니다. 우리로 치면 금수저(?)라고 할 수도 있어요. 팔메가 스무 살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갑니다. 1947년 무렵 미국은 스웨덴 사람들한테도 기회의 땅이었어요. 추위와 가난을 피해서 많이 이주합니다. 그런데 팔메가 가서 보니까 미국이 본인이 생각했던 자유와 기회의 땅이 아닌 거예요. 인종차별이 너무 심하고 빈부격차도 너무 심하고. 그래서 오히려 미국에 가서 반자본주의자 비슷한 사람이 돼서 돌아와요. 우리 스웨덴에는 절대 이런 빈부격차가 있으면 안 되겠다. 그래서 대학 때 쓴 논문이 하이에크의 ‘노예의 길’에 대한 비판을 주제로 썼습니다.

팔메는 스웨덴에 돌아와서 사민당에 들어갑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민당은 블루칼라 당이었고, 주요 직책을 맡은 사람 중에 대학을 나온 사람이 없었대요. 거의 초등학교 졸업한 사람들이었고요. 그런데 팔메는 청년사민당에 가입해서 활동하다가 사민당으로 들어온 거예요. 팔메 가문에서는 팔메 할머니가, 원래 보수적인 집안이었으니까요, “아니 왜 우리 집안에서 가장 뛰어난 애가 나라를 망치는 정당에 들어갔느냐”고 말할 정도였죠. 사민당도 처음에는 진정성이 있는 건가 싶었지만, 사민주의 이론에 해박하고 열심히 활동하니까, 결국 좋은 인재를 얻은 셈이 됐죠.

팔메가 총리가 되기 전에는 사민당의 에를란데르가 27년간 총리를 했는데, 팔메는 에를란데르 총리의 비서로 정치를 시작해서 42살에 총리가 됩니다. 에를란데르도 참 멋있는 사람인데요. 그는 다 아는 사회주의자였어요. 지금 정세균 총리가 하는 목요클럽을 시작한 사람도 에를란데르 총리였죠. 당시 스웨덴 노사관계의 골이 굉장히 깊었는데, 총리가 목요일마다 밥 같이 먹자면서 기업가와 노동자 대표들을 초대한 거죠. 5년, 또 5년…그렇게 계속 밥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노사관계의 변화를 만들어낸 겁니다. 또 이 분은 27년간 총리를 하고 마지막 투표에서 50% 넘는 득표를 사민당 단독으로 얻는 엄청난 성과를 낸 후에, 팔메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주고 떠났습니다. 사실 더 해도 상관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앞으로 사민당이 발전하려면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팔메를 총리로 세우고 떠났죠.

근데 팔메는 어떤 캐릭터인가 하면, 북유럽 사람들은 튀는 걸 좋아하지 않거든요. 그런데 팔메는 자기의 의견을 드러내거나 성격을 드러내거나 하는 게 강했어요. 토론할 때도 스웨덴은 독하게 말하는 분위기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팔메는 별명이 ‘독사’ ‘독을 품은 솜사탕’, 말을 너무 현학적으로 잘하는데 독이 들어있다는 거죠. 토론을 잘해서 여론을 확 자기 편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이 있었어요.

당시 팔메가 여러 정책, 그런데 부자들 입장에서 부담스러운 정책을 많이 폈죠. 금융소득세를 획기적으로 높였어요. 팔메 때 가장 높았다가 지금은 내려왔거든요. 소득세도 80%까지 올리고 대신 복지는 굉장히 많이 늘어나죠. 대부분의 제도를 현대화했어요. 우리나라는 거의 제도가 가족단위로 되어 있잖아요? 이번에 재난기본소득고 가족단위로 지급했는데, 스웨덴은 개인단위로 되어 있어요. 또 대학등록금 없앤 것도 팔메 시절에 없앴고. 등록금 없앨 때 반대하던 세력은 의외로 대학생이었어요. 그 당시만 해도 돈 많은 부자들이 주로 대학에 갔기 때문에 기득권을 뺏기는 셈이니까요. 팔메는 대학생들을 찾아가요. 토론, 배틀(웃음). 막 설득하고 그러는 사람이었어요. 그러니까 우파 입장에서 보기에는 기존의 전통을 허물어뜨리는 사람인 거죠.

또 팔메 시기에 왕의 권한을 형식적인 것으로 축소하고 의회가 실질적인 권한을 갖는, 그런 개혁도 했죠.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팔메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었고, 그래서 스웨덴 안에는 팔메를 정말 비이성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팔메는 사랑도 많이 받았지만 미움도 많이 받았거든요. 팔메모습을 한 지푸라기 인형 만들어서 화형식도 하고, 자녀들을 위협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굉장히 이런 위험을 안고 사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팔메가 암살당했을 때 사람들은 범인이 극우주의자일 것이다, 싫어하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까. 그런 말들을 많이 했죠.

극우주의자들 중에 첫번째 용의자는 빅토르 굿나르손이라는 사람인데 당시 33살이었어요. 이 사람이 용의자가 된 이유는 그날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팔메에 대해 거칠게 비난하고 욕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제보전화가 왔는데 이 사람을 찾아내서 집에 가보니까 실제로 팔메를 음해한 증거들이 나오고, 극우주의 전단 같은 것들도 많이 발견이 된 거죠. 극우주의 조직에 소속이 돼 있었는데 그 조직의 자금줄이 탄탄했고, 그 자금줄이 미국 CIA와 연관이 있더라는 얘기도 나왔죠. 그런데 스웨덴 검찰은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하지 않고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고 풀어줍니다. 이 사람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94년에 사망합니다.

또 다른 극우주의자는 ‘데코리마맨’이라고 불립니다. 데코리마는 팔메 부부가 밤길을 걷다가 함께 바라본 상점 이름입니다. 그런데 목격자들 중에 데코리마 앞에 수상쩍은 남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그 사람이 경찰은 아닌 것 같은데 무전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증언이 나오는 거죠. 알고 보니 그 사람은 경찰이었고, 일체 모든 것에 대해 함구하고 묵비권을 행사했어요. 이상한 점은 이 사람이 경찰 내에 야구단이라는 모임 소속이었어요. 그런데 그 야구단이라는 조직은 악질경찰 모임이에요. 노숙자나 힘 없는 사람들에게 마음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사람들. 데코리마맨은 철저히 묵비권을 행사해서 풀려났는데 이후 공부를 해서 판사가 됐고 이후 사민당의 반대당인 온건당의 국회의원이 됐어요. 2018년까지 국회의원 하다가 지금 판사로 돌아갔죠.

다음 극우주의자는 ‘스카니아맨’이에요. 암살이 일어났던 바로 그 옆 빌딩 이름이 스카니아예요. 스카니아에서 일하던 스티그 앵스트림이라는 사람이 퇴근하는 길에 암살사건을 목격했다고 증언을 했어요. 그런데 말이 계속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경찰이 처음에는 중요한 목격자로 분류했다가 말이 자꾸 바뀌니까 배제를 했어요. 그런데 지난 수요일에 검찰이 범인이라고 최종 발표한 사람이 바로 이 스카니아맨이었어요. 좀 이상한 것이, 모든 목격자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기를 키는 180~185cm, 짙은 머리색, 헐렁한 코트를 입었다고 말했는데, 스카니아맨은 키는 큰 데 굉장히 땅땅한 체격이예요. 그리고 안경을 썼어요. 머리색은 금발이고요. 어쨌든 스웨덴 검찰은 스카니아맨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이 사람이 자살을 해서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할 수 없어 종결한다고 발표했죠.

 

용의자2. 크리스터 페테르손

이 사람은 유일하게 기소당했고 감옥에 갔다가 무죄로 풀려났어요. 왜 감옥에 갔느냐, 팔메의 아내인 리스베스 팔메가 범인으로 지목했기 때문이에요. 앞서 말씀드린 용의자 공통점을 가진 사람들 12명을 인근에서 찾아서 보여줬는데 리스베스 팔메가 망설임 없이 단번에 이 사람이라고 찍었던 거죠. 이 사람은 10대시절 촉망받는 배우 지망생이었는데, 어쩌다 약물에 손을 댔고 이후 조현병이 발병해서, 20대 초반에는 모르는 사람을 찔러서 사망하게 한 전과가 있었습니다. 리스베스 팔메가 이 사람을 지목하는 바람에 감옥에 6개월 정도 갇혔다가, 항소심에서 법원이 이 사람은 아무 증거가 없고 당시 리스베스 팔메가 너무나 혼란스러웠던 상황이다, 그러니 새로운 증거가 나오기 전까지는 무죄라고 선고하고 풀어줬죠. 스웨덴의 유명한 프로파일러가 이 사람을 포함한 12명의 사진을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범인을 지목하라고 했더니 50% 넘는 사람들이 이 사람을 지목했다고 해요. 그러니까 페테르손이 소위 ‘범죄형’으로 생겼다는 거죠. 그런 선입견이 작용했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페테르손은 이후 이름이 공개되는 바람에 평생 이 사건과 관련해 시달리고 간혹 언론에 인터뷰도 하면서 살다가 2004년에 두개골 골절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 전날 다른 사건으로 경찰조사를 받았는데, 그때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얘기도 있어요.

용의자3. 쿠르드 노동자당(PKK)

초기에 사건이 일어나고 경찰이 아무 대응을 안 했어요. 사건이 일어나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거리 통제도 안 했고, 그날 약물중독 집중단속 기간이어서 주변에 경찰이 깔려 있었는데도 제대로 대응을 못했죠. 스톡홀름 중심에서 공항까지 30분이면 가는데, 차단을 안 해서 범인이 미리 계획했다면 달아나서 비행기 타고 다른 나라로 갈 만한 시간이 있었던 거죠. 총알도 경찰이 찾지 못했어요. 두 발 중 하나는 꽃을 가지러 온 시민이 가져다주고, 두 번째는 인도 기자가 쓰레기통 옆에서 찾아서 갖다줬죠. 그렇게 무능하게 대응하면서 6개월 동안 아무런 진전도 없으니까 경찰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던 중에, 수사반장인 한스 홀메르가 쿠르드 노동자당을 지목했어요. 쿠르드 사람들이 독립운동하면서 스웨덴으로 많이 이주했는데, 10만명, 스웨덴 인구의 1%쯤 돼요. 당시 테러가 벌어지고 하면서 경찰이 쿠르드 노동자당을 도청하고 있었는데, 암호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결혼’이라는 말이 오갔나봐요. 그 말이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암살을 뜻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면서 용의자로 지목이 됐는데 아무 증거도 안 나와서 결국 수사반장이 옷을 벗었어요.

용의자4. 스웨덴의 무기산업

스웨덴 하면 노벨상이 떠오르잖아요? 노벨은 사실 다이너마이트를 발견한 사람이고요. 스웨덴은 당시부터 폭약, 폭발물에 굉장히 강했고 노벨인더스트리 안에 무기 만드는 기업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보포스(Bofos)예요. 2차세계대전 때 지대공 미사일을 공급했던 회사고요. 무기산업이 스웨덴 경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팔메가 총리를 하다가 선거에서 지고 사민당 당수로 남아있던 시절, 이란-이라크 분쟁을 중재합니다. 스웨덴은 무기수출국이지만 분쟁지역에 무기를 수출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돼 있습니다. 그런데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무기회사들이 무기를 경유해서 수출합니다. 이란에서 주문이 들어왔지만 싱가폴, 바레인 거쳐서 또는 기차로 동유럽 우회하는 식으로 수출을 하는 거죠. 그런데 어느날 내부고발자가, 보포스가 이란에 무기를 팔았다고 고발합니다. 팔메가 1986년도에 무기산업에 대한 특별조사를 지시하면서 동시에 조사기간 중에 모든 무기수출을 금지합니다. 스웨덴 무기산업이 유력한 용의자인 것이,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사건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이 누구지?라고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잖아요? 무기산업은 팔메 암살로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거죠. 팔메가 암살당하기 한달 전에 이란 대사가 찾아와요. 왜 무기 안 주느냐고 항의를 하죠. 암살당한 그날 낮에는 이라크 대사가 찾아와요. 너희 분쟁지역에 무기 안 팔기로 해놓고 왜 무기 팔아? 라고 항의하는 거죠. 팔메가 암살당하고 딱 한달 후에 보포스가 인도와 3천억짜리 무기계약을 합니다. 그래서 무기산업이 암살의 배후일 수 있다고들 이야기하죠. 

 

용의자5.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

팔메가 세계 여러 나라의 독재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발언을 세게 했어요. 베트남전쟁에 대해서도 반대를 하도 많이 하고 다녀서, 한때 팔메 별명이 “베트남 외무부장관”이었어요. 팔메가 스웨덴 공식적인 자리에서 베트남전쟁은 반 인륜적인 전쟁이라고 하면서 게르니카(나치)나 다름없는 폭력이라고 말했는데, 당시 미국 국무부장관이던 헨리 키신저가 유태인이었거든요. 자기가 지휘하고 있는 외교정책을 나치와 똑같다고 하니까 엄청 화가 나서 그 다음날 바로 스웨덴 대사 소환하고 외교를 단절해요.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경우는 팔메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을 반대했고, 본인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채널을 통해서 이 이야기를 했어요. UN에 가서도 얘기하고. 아파르트헤이트 중단하지 않으면 정부 차원, 민간 교류까지 끊고 항공도 폐지하겠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스웨덴 같이 조그만 나라가 끊어야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고 했는데, 덴마크, 노르웨이, 독일, 유럽국가들이 하나 둘 합류면서 영향력이 더 커진거죠. 그래서 남아공 정부가 팔메 암살에 역할을 했다는 게 널리 알려진 이야기예요.

용의자6. 미국 CIA

미국 입장에서는, 냉전시기에 남아공 인종차별주의 정부는 영국과 미국이 후원하는 정부였고, 반대당은 스웨덴이 후원했는데 미국과 대립하고 있던 중국도 여기(반대당)를 후원했거든요. 미국입장에서는 마음에 안 들죠. 팔메는 미국 소련 둘 다 엄청 욕했거든요. 그러면서 중간의 약한 나라들 모여야 한다면서 동유럽하고도 친하고 두루 약소국들과 잘 지냈어요. 그리고 총리임기 끝나면 유엔사무총장에 도전하겠다고 공공연하게 말했죠. 제3세계에서 표를 주면 팔메가 정말 유엔사무총장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미국 입장에서 자기 말 안 듣는 유엔사무총장은 필요없으니까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된 거죠.

이와 관련해서 제보자가 있어요. 짐바브웨, 잠비아에서 용벙으로 일하다가 스웨덴에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용병으로 일할 때 알고 지내던 CIA 요원이 자기를 찾아왔대요. 영화산업 종사자라고 하면서 “사람을 죽일 때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더래요. 이 사람은 본인이 용병출신이니까, 가까운 곳에서 쏠 때 총의 탄두를 십자모양으로 벌리면 몸에 들어갔을 때 폭발적인 힘이 나온다, 라고 말해준 거죠. 처음엔 정말 영화 때문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전해준 자료를 보니까 팔메의 동선, 점심먹은 것, 병력, 이런 것들이 다 나와 있었고, 다른 봉투에는 200만 달러가 들어있었다는 거예요. 너무 놀라고 무서워서 나 못하겠다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근데 나중에 총알 발견되고 나서 경찰쪽에서 발표한 내용을 보니까 총알이 특이한 거예요. 원래는 구리가 납을 싸고 있어야 하는데 납을 구리가 싸고 있는 거죠. 이 사람이 말했던 방식대로 십자모양을 벌려서 모양이 그렇게 변했을 수도 있지 않나, 개인적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었어요. 또 실제 이 사람이 말한 그대로, 가까이에서 총을 쏴서 사망했어요. 이 제보자 말이, 로데시아에서 일하던 용병, CIA가 스웨덴 정보국에서 받은 팔메의 자료, 남아공에서 지원한 돈, 이렇게 해서 계획을 짰다고 해요. 또 처음 용의자로 지목된 빅토르 굿나르손을 이용해서, 범인이 도주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시간을 끌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답니다. 굿나르손은 평소 항상 팔메 욕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빅토르 굿나르손이 진범은 데코리마맨이라고 지목을 했다는 거예요.

팔메 반대파였던 칼 빌트가 말하기를, 스웨덴에는 딱 세 부류가 있다. 안티 팔메, 프로 팔메, 아니면 그냥 팔메. 그러니까 스웨덴에서는 팔메라는 사람을 두고 사랑하거나 증오하거나지, 미지근한 태도를 가진 사람은 없다는 거예요. 어떻든 이 사람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고 나서, 팔메의 업적을 이야기하자면 국내적인 업적도 굉장히 많지만, 그 전까지는 스웨덴이 존재감이 별로 없는 나라였어요. 제가 스웨덴에서 공부하고 왔다고 하면 스위스요? 스페인이요? 하는 상황이니까요.(웃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알려진 계기는 사실 팔메 때문이었거든요. 냉전시대에 어떤 나라도 미국과 소련을 거스르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팔메는 했지요. 팔메는 누구한테든 비판적으로 다 말했고, 당시 기자들 사이에서 팔메의 별명이 ‘스웨덴의 양심’이었다고 해요.

지금은 EU대사로 가셨지만 이전 한국 스웨덴 대사였던 다니엘손 대사님은 본인이 제일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서 청년사민당원으로서 연설했던 것이 “한국의 독재를 우리가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대요. 본인이 십대였을 때. 당시 스웨덴 사민당은 마치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거기에 대해 본인이 무슨 책임이라도 있는 것처럼 전 세계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는 거죠. 지금까지도 그런 전통을 갖게 된 것은 사실 팔메 때문이에요. 팔메가 아니라면, 모든 제도에서 서로 비슷한 행보를 걷고 있는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중에 유독 국제문제에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게 스웨덴인데, 그런 전통을 만들어낸 게 팔메죠.

이 사람이 없어졌으면 하는 세력이 이렇게 많았습니다. 결국 스카니아맨으로 밝혀졌지만, 이번 기자회견 때 담당검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당신보다 훨씬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고 민간조사보다 더 많은 자료를 면밀하게 검토해서 내린 결론이 이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하고 또 다른 조사를 이어간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조사는 없다”라고요.

팔메 집권 시기에 추진된 주요 정책들

여기 쓰인 모든 정책을 다 팔메가 다 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스웨덴에서는 한 가지 제도, 법률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한 사람이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그 당이, 그 시대가, 그 역사가 했다고 봐야겠지만, 그럼에도 팔메 시기에 매듭지어진 것이 굉장히 많았고, 또 팔메가 집권했던 시기가 레이건과 대처가 있었던 신자유주의 시기인데, 그 흐름을 거슬러서 혼자 반대의 길을 가는 건 팔메 같은 강한 리더십이 아니면 어려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기에 팔메가 했던 정책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올로프 팔메 총리 재임시기(1969~1976, 1982~1986) 정책

왕정국가에서 의회 민주주의 국가로 헌법 개정 /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개혁 / 다당제 확립, 의제별 연정 시도 / 고용보장 확대 / 실업급여, 병가수당 등 확대 / 노동조합 권한 확대 / 가족단위 과세에서 개인과세로 개혁 / 복지 단위 가족에서 개인으로 / 여성근로 장려 / 교육개혁(대학 등록금 폐지) / 공공의료 강화 / 공공 치과보험 도입 / 공공어린이집 확대 / 아동수당 확대 / 지자체 보육시설 지원 / 아동학대 방지를 위해 아동권리위원회 조직 / 장애인 정책 정비 / 시민교육 강화(스터디 서클 민주주주의) / 금융소득 과세, 소득세 인상 / 사회보장 확대 / 노인복지 강화 / 정치적 망명 및 분쟁지역 이민 수용 / 이민자 흡수동화주의 대신 다문화주의 채택 / 노동연금 수급자격 확대 / 여성장관 30% / 임노동자기금 부분적 실험 / 화석 에너지 비중 줄임 / 미소 양강구도에 대항해 제3세계 국가 연대 / 적극적 중립 외교 / 아프리카 인종 분리정책 비판 / 팔레스타인 지원 / 베트남 반전운동 지원 / 미국-소련 비판 / 동유럽 공산주의 비판 / 남미 독재정부 비판 / 핵 확산 방지 / 이란-이라크 중재

이 분이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제가 다니던 학교 교수님 중 한 분이 팔메의 첫째 아드님인데, 팔메 암살과 관련해서 어떤 언론 인터뷰도 하지 않습니다. 이분은 복지분야 세계적인 학자인데, 연구를 통해 아버지가 추진한 정책, 보편적 복지정책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죠. 보편복지를 했더니 가난이 줄어들더라…이런 연구를 하고 계십니다. 여러 모로 저한테 팔메는 특별한 주제고, 이렇게 끝나서 섭섭하기도 한데, 어떻게든 역사는 매듭이 지어져야 하니까 어쩔 수 없겠거니 합니다. 그런데 기록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어서, 그건 안타까워요. 오늘 팔메를 여러분께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이 저한테는 큰 영광이었습니다.

이 분이 마지막에 했던 연설로 마무리 짓겠습니다. 58년 8월에 했던 사민당 청년회의 연설인데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우리는 그저 청소년일 뿐이야. 우리가 정치인도 아닌데 무슨 영향력이 있으며, 세계에 대한 무슨 책임이 있단 말이야?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정치인이다. 우리가 어디서 왔든, 무슨 일을 하든 우리는 정치인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사회를 바꾸고 세계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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