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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소개

9월 총행복포럼 | 이재열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

일시 | 9월 18일(수) 오후 7시

장소 | 서울 양재동 ‘숲과 나눔’ 강의실

목차 |

  1. 풍요의 역설
  2. 사회의 품격
  3. 공공성과 재난
  4. 갈등관리 역량
  5. 지속가능한 사회

강연

강연

책 제목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늘 연구논문들만 쓰다가 출판사에서 대중들을 위한글을 써달라고 해서 책을 가능한면 쉽게 썼는데, 기획을 하는 젊은 친구들이 와서 (제목을) 소개하더라고요. 제가 처음 정했던 건 <사회의 품격>이었는데, 권유를 받아들여서 <다시 태어난다면, 한국에서 살겠습니까>로 바꿨습니다. 젊은이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그렇게 결정했는데, 출간하고 보니 제목에 끌린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웃음) 오늘 제가 할 이야기는 크게 5가지인데, 풍요의 역설, 사회의 품격, 공공성과 갈등, 갈등관리 역량, 지속가능한 사회, 이렇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의 시대정신, 민주주의 ‘제대로’하고, ‘어떤’ 성장인지가 중요

시대를 되돌아보면 각 시대마다 독특한 시대정신이 있었던 것 같아요. 1960~70년대는 ‘잘 살아보자’는 경제가 최고의 가치였지요. 1980년대는 직선제, 민주주의, 나라를 제대로 바로잡자는 정치의 가치가 지배했습니다. 그럼 이 시대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제대로’ 민주주의를 하느냐의 문제, 성장은 ‘어떤’ 성장이냐가 중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왜냐하면 경제성장을 더 할수록 탈산업화하는 상황에서 플랜트째 떼어 가지고 베트남이나 중국으로 가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됐죠. 고용 없는 성장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회학자 한 분은 우리가 ‘헝그리사회’에서 ‘앵그리사회’가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성장해서 행복해야 하는데, 모두들 왜 분노하고 화내는 사회가 됐냐는 얘기죠.

그래프/ 2013년 UN 행복보고서 ‘행복감과 국민소득’

UN의 행복보고서를 보면 2013년 41위, 작년 것은 57위까지 떨어졌더군요. 우리가 우습게 보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오히려 더 행복감이 큰 상황이죠. 그래프에서 X축을 국민소득, Y축을 국민소득이라고 볼 때 국민소득과 행복감의 관계는 비례하는 거라고 볼 수 있을 텐데, 북유럽국가나 동남아 국가는 위에 있고 남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밑에 있습니다. 근데 이걸 좀더 비교해보면 비슷한 소득수준에 있는 나라 중에, 예를 들어 중국과 포르투갈은 중국이 훨씬 행복감이 떨어집니다. 같은 소득을 가진 한국과 이스라엘을 비교해보면 한국이 훨씬 떨어지고요, 대만과 캐나다, 일본과 덴마크 비교해보면 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떨어지거든요. 그러니까 동아시가 국가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게 합니다.

또 상관관계를 보니까 물론 GDP도 중요하지만 투명성, 남녀평등, 신뢰, 언론자유, 복지에 대한 지출 등도 상당히 유의미한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복합적으로 분석해보니까 시민사회와 시민참여를 통제하니까 행복감이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우리 정도의 소득수준을 가진 나라에서는 더 이상 소득이 늘어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시대는 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구매력을 기준으로 본 소득도 우리나라가 상당히 높습니다. 일본이나 영국, 유럽 여러 나라에 별로뒤지지 않고요. 일본에 지난해 가보니까 물가가 왜 그렇게 싸죠? 강릉에 가니까 물가가 왜 그렇게 비싸죠? (웃음) 그러니까 우리 원화의 구매력이 엄청나게 높아졌고, 해외에 나가면 굉장히 잘 쓸 수 있는 상황이 됐는데, 자산률은 계속 올라가고 있어요. 다른 나라들은 계속 떨어지는데 한국만 올라가서 OECD 1위까지 올라갔죠. 그리고 ‘중산층이냐’는 질문에 80년대 우리가 소득이 지금의 10분의 1쯤 됐을 때는 60%가 중산층이라고 답했는데, 3만불이 된 지금은 20%만 중산층이라고 답을 했습니다. 나머지는 서민이라고 답을 했거든요. 그런데 ‘서’라고 하는 의미는 보통사람이라는 뜻도 있지만, 사실 조선시대의 ‘서’는 첩의 자식이거든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나를 중산층이라고 하지 않고 ‘서민’이라고 하는 건 굉장히 자학적인 표현이다, 계층적인 자신감이 굉장히 뒤지는 거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국민소득 높아졌는데 행복하지 않은 이유: 물질재와 지위재 

왜 이렇게 됐을까요.  여기에 대해서 답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1970년대 프레드 허쉬라는 경제학자가 ‘성장의 사회적 한계’라고 하는 책을 썼어요. ‘사회적 한계’의 의미는 2차대전 이후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풍요로운 사회가 됐는데, 사람들이 불만이 많더라, 성적으로나 히피세대처럼 혹은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갔는데 분배에 있어서는 극단적인 사회주의 정책을 지지하더라. 그래서 파악을 해봤는데 두 가지로 구분하게 된 거죠. .

하나는 물질재, 재화나 서비스를 공급하면 의식주의 공급은 밀물효과처럼 경제가 성장하고 공급이 늘어나면 그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위치의 사람들도 혜택을 받습니다. 1970년대 생각해보면 참 불편한 집이었거든요. 매일 대여섯 시간마다 연탄을 갈아야 하고 온수도 나오지 않고 먹는 것도 시원치 않았는데 굉장히 희망적으로 미래를 봤어요. 정치적으로는 억압적이었지만 뭔가 나아질 거라 생각하며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질 거고, 부모세대보다 나는 나아질 거고, 앞으로는 더 좋아질 거고…그런 희망들이 있었죠. 최근에 베트남에 갔더니 딱 그 모습이더군요. 하노이 20대 초반 젊은들이 거리에서 야트막한 의자에서 쌀국수 먹으면서 얼마나 활달하고 행복해 보이던지. 그런데 우리는 ‘헬조선’을 이야기하고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라고 합니다. 비관적으로 보고 있고, 국민들은 더 이상 중산층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굉장히 역설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민주화가 됐다고 하는데 정치에 대한 불신이 극단적인 상황이고요. OECD 국가 중에서 투표율이 가장 낮은 편에 속하거든요. 여의도 정치에 대해서 아주 냉소적으로 얘기하는데 정작 운명을 결정하는 투표에 가선 투표율이 낮습니다. ‘풍요의 역설’ ‘민주화의 역설’에 시달리고 있는 겁니다.

허쉬가 이야기하는 것은 물질재만으로는 안 된다, 지위재 즉 포지셔널 굿이라고 하는 것은 남들도 그걸 얼마나 요구하는가에 따라서 내 효용이 결정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풍광이 좋은 곳에 나 혼자 집을 짓고 살면 쾌적한 환경을 누리겠지만, 거기가 좋은 데라고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난개발을 하면 엉망이 되겠죠. 좋은 대학, 좋은 일자리, 좋은 곳에 있는 주거, 이것이 전형적인 포지셔널 굿입니다. 과거에는 좋은 곳을 공급하면 됐는데, 이제는 좋은 곳을 늘리면 경쟁이 격화되죠. 대표적인 것이 대학진학률입니다. 우리나라 대학진학률이 1980년대에 대학을 늘리면서 고등학생들이 전부 대학을 가게 됩니다. 그 결과 과거 어느때보다도 대학입시는 치열해지고 어마어마한 선행학습 경쟁을 합니다. 선행학습 경쟁이라고 하는 게 일종의 ‘레드퀸 경쟁’이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내가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앨리스는 옆에서 똑같이 열심히 뜁니다. 그러니까 한 발이라도 앞서 나가려면 고등학교 것을 중학교 때, 유치원에서부터 영어를 하는 거죠. 그러면 공교육은 황폐화되고 다 사교육에 올인하니까 행복감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요인이 뭐냐, 바로 지나친 경쟁이예요. 강남 8학군 학부모들의 행복감이 가장 떨어진다는 연구결과도 있어요. 이런 식으로 가다 보니까 대학졸업자에게 걸맞은 일자리는 한국은행 추계로 보면 500-600만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대졸자는 1000만이 넘어가거든요. 그러니까 나이가 30살이 된 남성들이 그때 가서 갈 데가 없다는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200만 명가량의 니트족(NEET족,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줄임말)이 생깁니다. 구직활동을 안 하니까 실업자로는 안 잡히지만 캥거루족처럼 싸여 있죠. 한쪽에서는 생산직에서는 사람이 없으니까 외국인연수생을 데려와 써야 하니까 심각한 믹스매치입니다. 예전에는 상업고등학교 출신 대통령이 세 분이나 있지 않았습니까. 대학졸업률이 30%일 때는 실업고등학교를 나와서 장관, 은행장, 대통령도 했지만 이제는 대학원까지 나와도 예전 고졸자들이 하던 일을 합니다. 사회적 효용은 커지지 않는데 경쟁은 훨씬 치열해진 거죠. 이것이 경쟁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고요.

 

지나친 경쟁이 행복감을 낮춘다

베이비붐 세대에 비해 그 자식세대인 에코세대는 일자리 구하기 어렵고 경쟁이 심해졌습니다. 결혼도 못하고 아이도 못 낳습니다. 한 개인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 그래서 발생하는 웰빙이라고 하는 것은…그 사람이 가진 능력, 자산, 인맥 이런 것들은.. 개인이 처리할 수 있는 한도를 넘어서서 도전이 너무 심해지면 좌절하고 엄청난 스트레스로 고민할 수 있고, 반대로 너무 낮으면 지루하고 따분하죠.

안토노프스키의 얘기도 비슷합니다. 인생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강물에 떠내려가는데 일정한 거리를 지나고 나면 폭포가 있습니다. 거기까지 떠내려가기 전에 일종의 저항자원이죠, 여러가지 자원과 능력, 방향감각, 통합력이라고 할 수 있죠. 내가 어디로 건너가서 어떻게 가야 빠져나갈 건가 하는 명백한 목표가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건강’이라는 건 건강하다, 질병이다 하는 범위가 아니라 건강부터 죽음 사이의 연속성이다. 사람들 중에는 무조건 건강하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고, 건강우려증에 걸린 사람들도 있고, 그 중간 어디쯤에서 사는 건데, 그럼에도 매니징할 수 있으면 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웰빙’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결국은 ‘건강한 삶이란’ 몸이 건강해야 하고요, 전통적인 성리학이나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정(情)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적 관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혼(魂)이라고 하는 것은 데렉 보크 전 하버드 총장이 힌트를 줬습니다. 이분은 대학총장을 20년 한 분인데, 행복에 대한 연구를 해서 <폴리틱스 오브 해피니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 내가 죽은 다음에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할지를 관심있는 사람들이 ‘영적인 사람’이다, 라고 했어요. 그런 사람들이 누리는 것이 ‘영적인 웰빙’이 아닌가 해요. 여기 아닌 다른 곳에 대한 관심이 여기 있는 것을 더 행복하게 한다는 얘기죠.

현실이 불만스럽고 미래가 불안한 세대

우리는 이 네 영역에서 많이 아픈 사회이고 아픈 개인이죠. 종합적으로 보면 우리는 불신을 하고 있고 고속성장을 했기 때문에 웬만한 성장에는 만족하지 못합니다. 미래가 불안합니다. <은퇴 후 30년>이라는 베스트셀러를 보니까 2015년에 태어난 아이들은 142세까지 살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지금으로 따지면 강화도조약 때 태어난 사람이 아직 살아 있는 겁니다. 기술변화가 빠르지 않았는데도 그 정도라면, 지금 무슨 준비를 해야 할까. 은퇴 후 30년이 아니라 50년, 100년을 준비해야 하는 세대가 된다면 과연 행복할까, 불안하지 않을까.

청년들은 창업을 기피합니다. 청년창업가가 우리는 1년에 2000명인데 중국은 50만 명이라고 해요. 다 공무원 시험에 응시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공동체 의식은 부족하고 불행에 시달리고. 우리가 더 나아진다는 건 미래에 대한 희망, 제도 신뢰, 현실 만족, 적극적인 창업과 혁신 같은 것들일 텐데 왜 안 될까.

정부에서 잘 안 하려고 합니다. 이런 것을 좀 측정하자, 행복지표를 만들자고 하면 그렇게 반대를 해요. 왜냐면 2016년 OECD 자료를 보면 Korea Society at Glance인데요, 우리나라가 전부 최하위입니다. 출산율 최저, 지금 1 이하로 떨어졌죠. 인류 역사상 처음입니다. 그동안 125조의 예산을 썼다고 하는데 브레이크가 안 걸립니다. 내년 예산도 30조 이상 쓴다고 하는데요. 고령화도 굉장히 심각하죠. 노인인권이나 노인자살률 최고, 그런데도 복지출연 안 하고, 자살률 높고요. 만족도 낮고 낯선 사람 믿지 않고 정부 신뢰하지 않고 외로운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가 공동체적이고 유교적 사회라고 했는데, 아프거나 외로울 때 아무도 돕지 않는 고립상태인 사람이 OECD에서 수준이 제일 높습니다. 반려견은 가족인데 따로 사는 할머니는 가족이 아니라고 해요. 부모를 찾아가는 빈도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데, 다른 나라는 부모라서 찾아갑니다. 유일하게 한국만 부모의 자산에 비례해서 자식들이 찾아갑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공동주택에 거주합니다. 아파트나 연립주택에 삽니다. 가장 밀집된 주거인데 가장 익명화된 공간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옆집에서 미이라가 되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따뜻한 공동체는 과거의 신화이지, 전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개인들만 존재하는 사회로 빨리 가고 있습니다.

고립된 개인, 공동체 파괴가 국가경쟁력 약화를 부른다

이것이 여러 위기와 연결이 됩니다. 국가경쟁력과도 관계가 있어요. 우리가 잘하는 건 이런 겁니다. 양적인 투입. 그러니까 거시경제 지표라든지, 인프라 까는 것, 인터넷 깔고, 고속철도 깔고, R&D 투자하고, 대학진학률 높고 이런 것은 다 좋습니다.

안 되는 게 뭐냐. 다 관계와 제도에 대한 겁니다. 기업의 윤리, 노동시장 규율, 시장 규율, 은행 건전성, 교육의 퀄리티 이런 건 100등 수준 이하거든요. 고투입/저효율 사회로 왔습니다. 이런 것들 것 빨간불이 들어오고 있는데, 이것이 ‘사회성’과 연결돼요. 사회성은 개인이 가지는 사회성도 있지만 한 사회가 보여주는 관계의 특징이다, 라고 봅니다.

이렇게 볼 때 좋은 사회라고 하는 건 공동체성이 있는 사회인데, 유럽 학자들의 논의를 보면 좋은 사회는 4가지 가치가 잘 구현된 사회라고 합니다. 하나는 매크로한 수준에서 그 사회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도 생존할 수 있는 분배적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이면서, 본인이 고칠 수 없는 얼굴색이나 젠더로 인해서 차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 또 개인이 각자 임파워될 수 있는, 자기분야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고, 사람들이 서로 신뢰하고, 규칙이 투명하고 이런 사회가 좋은 사회 아니겠어요?

그동안 한국사회 각 분야에서 조금 더 안전해지고 위험해진 부분이 있고, 좀더 포용적이거나 차별적인 부분도 있고, 더 활력을 느끼는 부분도 있고 무기력해진 부분도 있는데, 압도적으로 불신이 늘어났습니다.  한국의 최근의 변화, 20여년 변화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불신사회’로 변화가 가장 눈에 띄는 부분입니다. 서베이를 해봐도 신뢰 쪽이 가장 찌그러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이 된 게 한국사회를 가장 잘 요약한 것이죠.

이걸 국제적으로 비교하기 위해 틀을 좀 바꿔봤어요. 하나는 복지입니다. 시스템적으로 국가가 얼마나 보호할 수 있느냐. 각 개인의 능력을 신장할 수 있는 교육과 훈련에 투자를 하느냐, 사람들이 참여하고 정치적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통로가 활성화돼 있느냐, 규칙이 투명하고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응집성이 있느냐를 가지고 비교해봤더니, 이렇습니다.

OECD 국가들을 비교해보니까 28위입니다. 1등이 덴마크고 우리는 거의 꼴찌입니다. 우리 밑에 멕시코하고 터키가 있습니다. 조금 잘하는 건 인적자본인데, 워낙 사교육에 많이 쓰니까 공교육이 황폐화되도 조금 나은 그런 상황이고요. 정치참여는 거의 꼴찌, 복지도 마찬가지로 꼴찌입니다.

그림의  네 영역에서 사각형의 크기가 품격의 면적이라고 본다면 1등인 덴마크와 28위인 우리의 사각형 면적 차이가 이렇게 납니다. 거긴 잘사는 나라니까 그렇겠지 하는 분들이 있어서 유럽이 2만불이었을 때를 보니까 독일과 영국은 90년대, 북유럽 국가들은 80년대였어요. 그래서 그 당시 복지에 대한 투자가 어땠는지 보니까 과 비교해보니까, 이미 적게는 2.8배에서 5.7배를 투자했어요. 이미 우리 경제 수준일 때. 분배의 정의, 응집성이런 것들은 우리보다 훨씬 높았고, 정치참여도 우리보다 훨씬 높았어요. 바꿔 말하면 이 나라들이 선진국이 됐다고 하는 것은 경제성장이 아니라 이런이런 품격을 갖췄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더 성장할 수 있었다.

성장의 한계에 부닥친 한국, 실력 경쟁이 안 되는 이유는 ‘불신’ 때문

요즘 온갖 경제 우려들이 등장하는데, 일종의 성장의 한계에 이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주열 한국은행총제가 디플레이션 우려를 표했다고 합니다. 모든 경제지표가 안 좋게 나타나고 있어요. 3만불의 덫에 걸린 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게 하는 증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삶의 질이라는 것은 그냥 좋은 얘기만 하는 거냐, 사실은 굉장히 구체적인 우리 삶을 설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중 하나가 복지가 잘 돼 있느냐, 교육에 얼마나 잘 투자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창의성 경쟁을 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거죠. 우리는 위험을 회피하는 경쟁을 합니다. 혁신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하는 대신 신분이 보장되는 일을 찾으려고 합니다. 개개인이 하면 합리적인 선택이겠지만, 사회적으로 보면 5년후 10년 후 우리 먹거리를 만드는 일을 아무도 안 하려고 한다면 우리 미래는 어떻게 되느냐는 우려를 하게 되죠.

또 사람들이 참여하고 의사결정을 하고 투명성이 높고 신뢰가 높으면 실력경쟁을 하고, 이런 실력경쟁에서는 타당성 있는 추천서가 제일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신임교수를 채용하면 외국 지도교수가 쓴 추천서는 A4용지로 4장, 5장이 되는데 지난 4~5년 동안 이 학생, 이 후보자와 생활하면서 겪었던 에피소드와 장점, 미래의 가능성을 얘기해주니까 읽어보면 ‘아, 이 사람과 일하면 어떻겠구나’ 하는 그림이 그려지고 이 사람의 인격이 느껴지거든요. 서울대에서 10여년 전에 학교장추천제를 하면서 학교성적 말고 진짜 잠재력이 있으면 학교장이 책임지고 추천하면 뽑겠다. 제가 심사를 해봤더니 ‘이 학생은 품행이 방정하고 성적이 우수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최상급의 형용사 수십 개 연결된 추천서입니다. 다 슈퍼맨과 슈퍼우먼이고 얼굴이 그려지지 않아요.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보니까, 책임을 못 지겠는 거예요, 학교측에서. 결국 학생대표 교사대표 꾸려서 항목별로 배점을 하고 웨이팅을 해서 학교장추천을 위한 추천위원회를 만들어서 0.001점이라도 높은 학생을 추천해야 뒷말이 없고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지 않는다고 해요. 그게 불신이 가져온 엄청난 피해입니다. 그 와중에 그걸 뚫고 갈 수 있는 사람들은 인맥을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시스템 전체가 불신을 받는 것이고, 약육강식으로 갑니다. 실패하면 죽는다는 생각을 하니까 새로운 걸 시도하면 가족들이 나서서 말리는 분위기가 돼 있죠.

우리가 복지를 해야 됩니다. 근데 복지가 그냥 되는 게 아닙니다. 이 그래프에서 X축은 시민사회 역량 Y축은 복지를 통한 지출입니다. 근데 선 위에 있는 나라들, 터키 멕시코는 복지가 안 되는 나라죠. 그걸 벗어나 있는 헝가리 이태리는 북유럽 국가들만큼 돈을 쓰는데 시민사회 역량이 부족하고 투명성이 떨어지니까, 예를 들어 그리스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맹인들을 위한 복지를 하는데 눈 뜬 사람들이 받더라고요. 우리가 지금 그렇게 하는 게 아닌가. 일자리에 예산을 쓰는 데 전혀 일자리 지원이 안 되는 방식으로 쓰는 건 아닌가. 예전에 벤처지원을 하는데 다 정부에 프로젝트 보고서 쓴 사람들이 대부분 받아갔다. 늘 어떤 붐이 있다 보면 거기에 누수가 되는 부분이 많은데, 우리는 역량이 안 되는데 아직 돈을 안 썼어요. 그거 다행입니다.(웃음) 그런데 이 체질을 바꾸지 않고 복지지출, 재정지출을 늘리면 저는 스웨덴으로 가지 않고 그리스나 이태리로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직 다행이라고 느끼는 거죠. 투명성과 놓고 봐도 똑같습니다.

시민사회역량, 투명성, 공공성 확보돼야 복지지출 의미 있어

새로운 복지에 대한 투자를 할 때 전통적인 것은 연금, 의료입니다. 가구주를 잘 보호해주면 가족이 다 보호받았는데, 이젠 그런 사회 아니거든요. 우선 1인 가구가 엄청 늘었고 조금 지나면 넷 중 하나, 셋 중 하나가 일인가구가 될 거라고 하고요. 끊임없이 산업구조가 바뀌고 재훈련 받아야 하고 돌봄노동이 필요하고 이런 여러가지 생애주기 불확실성이 늘어나게 되니까 그떄그때 투자형태의 복지가 늘어나야 하고 적극적인 노동시간에 써야 합니다. 물로 치면 물이 곳곳 적합한 곳에 다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데, 우리는 출발점에 있는데 과연 그리 갈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이 사회의 품격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슈들이 바로 ‘공공성’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할 때, 민주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공화는 별로 얘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공화는 결국 같이 사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시민 중심이고 규칙이 중요하고, 공정해야 하고 공익성이 있어야 하죠. 시민과 공개성이 민주주의라고들 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이것도 OECD국가들과 비교해 보니, 이건 진짜 꼴찌예요. 극단적인 물질주의가한 축이고 어마어마한 각자도생의 경쟁사회입니다. 같이 사는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지위재를 위한 경쟁에서 내가 밀리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가치관 조사를 보면, 다른 나라들은 대개 경쟁을 중시하지만 동시에 연대라든지 자원봉사 등등 가치들이 비교적 균형을 이루는데, 한국만 오로지 경쟁입니다. 우리가 거시적인 문제에 미시적인 뿌리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는 거죠. 그것이 드러난 것이 재난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월호는 공공성의 위기가 숙성돼 사고가 터진 ‘미래형 재난’

90년대 이후 일어난 재난에 특징이 있는데,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없으니까 서로 협력하지 않고 조정하지 않는 거죠. 남태령 역에서 전동차가 지나갈 때 전동차 전기가 나가는 건 왜 그럴까요? 당시 지하철공사와 철도청이 서로 협력이 안 돼서 그런 결과가 생긴 겁니다. 대구지하철 사고 났을 때 긴급통신망 통일이 하나도 통일이 안 되고 조율이 안 됐습니다. 그거 고치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10년이 지나서 세월호 사고에서 똑 같은 일이 반복됐습니다. 내 부서와 내 지역과 내 가족을 넘어서는 공유와 조율이 너무나 취약합니다. 거기에 규칙은 언제든지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부패의 문제와 연결이 되거든요.

위기는 늘 숙성이 된다. 예외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쌓여 있던 요소들이 숙성이 됐다가 쾅 터지면 재난이 된다. 그리고 거기서 배우질 못하는 거죠. 소 잃고도 외양간을 제대로 못 고친다. 간판만 바꾸고 책임자 사표 받고 그러고 넘어가면 또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세월호 사고라는 게 그런 의미에서 ‘미래형 사고’라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1079호에 한 장애인이 방화를 했는데 거긴 괜찮았거든요. 근데 다른 역에 있던 전동차가 들어와서 거기 있던 200명의 사람들이 20여 분만에 죽은 겁니다. 굉장히 복합적으로 얽힌 상황에서 돌발적인 일이 생기면서 엄청난 사고가 생기는데 그게 바로 미래형 사고인데, 복잡한 네트워크가 있거나 복잡한 시스템, 예를 들면 원전이나 우주선 같은 데서 나타나는 사고입니다. 한국이 이제 90년대식 사고에서 벗어나서 미래형 사고로 가니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세월호 사고가 터졌습니다. 90년대 서해 페리호 사고와 똑같았어요.

당시 국내 해외 반응이 너무 달라서 놀랐습니다. 국내에서는 비난의 정치로 갔습니다. 여야가 서로 나뉘어서 싸우느라고 진도가 안 나갔습니다. 외국 같으면 여야 합의로 진상조사를 하고 보고서가 나오고 법안을 개정하고 그 데이터를 가지고 조직론에 관한 책을 쓰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국내에서 나온 연구는 애도하고, 국가가 어떻게 무능했는지를 비판하는 얘기만 있어요. 외국 저널들은 시스템 실패로 얘기하면서 공저자 중 한 사람이 한국인 대학원생이더라고요. 한국 데이터를 가져다가 시스템 이론으로 설명하고 분석한 논문이 대부분이더라고요.

그 외국논문에서 나온 얘기는, 배의 선장을 기준으로 보면 운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책임감이 없는 사람, 임시 고용된 사람이니까. 그 전날까지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재난이라고 하는 것은 출현적인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시스템을 구성하는 여러 구성원들이 경제적인 압력을 세게 가하면 노력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일하다가 어느 순간 경계를 넘는데, 본인은 경계를 넘는 걸 몰라요. 왜냐면 남들이 하는 노력과 결합이 돼서 결과가 나타나는 거거든요.

어떻게 관리해야 하느냐. 결국은 규제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경계를 넘을 때 휘슬을 불어야 합니다. 휘슬을 안 불었습니다. 곳곳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세월호 사고라고 하는 것은 시스템 실패가 일어난 구체적인 사례지만 곳곳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과거의 부패와는 전혀 다릅니다. 과거의 부패는 정치부패. 이제는 공적인 무력화를 극대화하는 식으로 작용합니다. 이태리, 대만, 우리가 비슷한 구조입니다.

한국은 소득 불평등보다 ‘자산’과 인맥’ 불평등이 심각  

한국이 갈등이 심한 사회라고 하는데, 갈등의 소지가 있고, 사회적 배제나 불평등, 이질감이 심하면 유혈사태가 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역갈등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죠. 객관적인 지표로 보면 세 후 재분배를 보면 유럽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와 비교해야 하느냐, 아프리카나 동남아, 남미, 중국과 비교하면 거기는 지니계수가 0.5~0.6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높아도 0.35 정도. 그보다는 자산불평등이 훨씬 심하죠. 0.6이 넘습니다. 근데 진짜 심한 것은 인맥불평등인데 0.8이 넘습니다. 전체국민의 80%이상은 유력자의 인맥을 활용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전체인구의 0.3%는 거의 모든 인맥을 다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알고 있는 불평등과 실제 불평등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에서 갈등이 심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불신이 심해서’입니다. 심판을 못 믿습니다. 입법, 사법, 행정 중에서 입법은 특히 꼴찌거든요. 대통령보다 동네 구멍가게 주인 더 믿습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심판을 못 믿기 때문에 갈등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를 하기 때문에 그래도 좀 나은 부분이 있습니다. 평등하고 가난한 상황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이런 트렌드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80년대 권위주의 시대에 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훨씬 높았습니다. 지금 중국과 베트남이 그렇거든요. 민주화된 이후에 다 떨어지고 있습니다. 한때는 시민단체나 대학 종교가 신뢰가 높았는데 다 안 통하게 됐습니다. 이제 믿을 구석이 없어졌습니다. 특히 이념 갈등이 심각합니다. 에스엔에스로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의견교환을 하다보니까 진영간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체험의 단층입니다. 어떤 경험이 본인에게 가장 충격이냐고 물었더니, 나이 많은 세대는 전쟁, 그보다 젊은 세대는 광주민주항쟁, 그 다음 세대는 외환위기, 다음은 세월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세대의 단층은 마치 외계인들이 모여 사는 것과 같다. 노인들의 마인드는 러시아나 중국 노인들 같은 마인드고요, 젊은 사람들의 마인드는 서구의 녹색당과 같은 마인드. 태극기부대와 촛불과의 갭은 결국은 그런 프레임으로 보지 않으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죠.

민주주의의 등락이 심해서 우리 역사를 보면 우리 민주주의는 이런 등락을 거친 것이어서 지금 정치를 한다고 해도 과거의 기억과 경험을 가지고 정치를 하기 때문에 기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덴마크는 정말 재미없는 사회입니다. 정치인들이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출근해서 도서관과 의회를 다니고 자원봉사하는 사회입니다. 아무 권위 내세우지 않지만 다 존중받습니다. 이런 나라와 중국, 아주 일관성 있는 권위주의 나라입니다. 이렇다 보니까 갈등이 OECD 꼴찌입니다.

갈등소지와 제도적 해결역량을 살펴보면 한국은 딱 중간입니다. 어정쩡한 것. 갈등의 원인은 불평등보다 불신이 더 큽니다. 한국은 민주주의를 하기 때문에 정권이 왔다갔다하면서 뭔가를 풀어나가는 학습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전혀 안 돼 있습니다. 중국 정치학자를 만나서 이걸 보여주면서 중국은 갈등소지 큰데 민주주의도 안하고 팽팽하게 부푼 풍선처럼 보인다고 했더니 그 사람은 한국을 걱정한더라고요. 자기들은 공청단에서부터 리더들은 검증해서 중앙 상무위원이 되면 10년동안 권력을 준다, 근데 한국은 어디서 뭐하는지 모르던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임기가 끝나면 예외없이 감옥을 가더라. 어떤 시스템이 더 좋으냐고 정색하고 질문을 하더라고요.(웃음)

우리 시스템은 지금 ‘전환의 계곡’에 와 있습니다. 투명성이 높아지고 있는데 신뢰도는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엘리트 카르텔로 뭉쳐져 있는 상태, 이도 저도 아닌 약간 골병 든 것 같은 사회로 가고 있습니다.

정치가 너무 진영논리예요. 독일 슈레더는 노동자 대표로 나와서 노동개혁을 했습니다. 경직성을줄여서 고용률이 높아지고 경제성장을 했는데 선거에 떨어졌습니다. 나중에 메르켈이 집권하고 나서 당신이 그런 개혁을 해서 덕을 보지만 이건 내가 아니라 독일이 덕 본 거다, 하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미국에서 부자들이 세금을 70%까지 냈습니다. 공황 이후에 자발적으로 했습니다. 나라가 망하면 자본가도 살 수 없다. 결국 좌파가 집권할 때 노동개혁을 하고 우파가 집권했을 때 자본과 시장, 기업개혁을 하는 나라들이 제대로 가지, 진영논리로 하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불신의 사회 극복하고 ‘품격 있는 사회’로 가야

가장 갈등이 심했던 남아공에서는 300여만 명의 흑인들 희생됐는데 어떻게 평화적인 정권교체가가능했을까요. ‘몽플레 시나리오 컨퍼런스’라고 하는 것이 큰 역할을 했죠. 우리로 치면 노사정위원회인데, 탑 리더들은 뺐습니다. 차세대 리더들로 구성했습니다. 세상에 이거 아니면 못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안 되고 예측하고 인과관계를 따지는 방식의 논의만 허용했습니다. 대화의 원칙을 만들고 시나리오를 만들었더니 시나리오가 4개 나온 겁니다. 하나는 타조모델, 모든 걸 외면하고 그대로 가는 것. 또 하나는 레임덕 모델입니다. 흑인들이 집권하는데 전혀 백인들의 협조를 얻지 못해서 가난한 나라로 떨어지는 것. 세 번째는 이카루스 모델로 백인들이 권력을 고집하다가 이카루스처럼 타 죽는 것. 네 번째는 춤추는 플라멩고 모델인데 함께 춤을 추면서 같이 화합하면서 가는 것. 국민들한테 시나리오를 소개하고 많은 사람들이 플라멩고 모델로 가자고 했고, 만델라는 노벨상을 받았죠. 우리는 갈등거리만 생기면 폭발을 합니다.

지속가능한 사회가 되려면 현재 겪고 있는 민주화도 성장도 아니고. 결국은 ‘사회의 품격’입니다. 기업도 바뀌어야 합니다. 경주 최부자집에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도덕경제’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도덕경제’였습니다. 도덕과 무관한 경제인 파생상품이 만들어지고 파국까지 간 것은 인류 역사로 보면 가장 최근입니다. 유엔에서부터 각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트리플 바텀 라인’이라고 해서 지속가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최부자집과 똑같습니다. 우리나라 경제지표도 그런 관점에서 만들어가고 있고요. 세계적으로 보면 이런 트렌드로 가고 있습니다.

아랍 에미리에이트에서는 해피니스 앤 웰빙 부서를 만들고 장관을 임명했습니다. 영국에서도 고독부 장관을 만들었습니다. 결국 우리가 갖고 있는 지향과 목표가 물질적인 것으로도 안 되고 정치제도로도 안 되고 진짜 중요한 것들은 보이지 않습니다. 선진국은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잘 관리한 나라들입니다. 며느리 학벌도 보고 직업도 봐야겠지만 인품 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저는 그게 사회의 품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기업, 정치는 막가는데,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소비자가 바뀌고 투자자가 바뀌고 있습니다.  땅콩회항을 하면 기업이 망할 수 있다, 정치도 그렇게 하다가는 다음 번에는 국물도 없다는..그런 에너지가 어떻게 모아져서 가꾸어져야 할지 그게 행복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이 행복은 개인의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조와 모순과 고통과 떼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같이 풀어나가야 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질의응답

 Q1. 품격 있는 사회로 가려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말씀해달라.  

사회학자들은 진단은 잘하는데 처방을 못해서.. 죄송하다(웃음). 우리가 현재 가진 문제를 일종의 성장통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영국에서 마그나카르타 이후 정착에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리는 30년만에 민주주의를 했다. 정치학자들과 이야기 나누면 헌법을 바꾸지 않아도 선거법만 바꿔도 훨씬 나아진다고들 한다. 일반 시민들에 관심 없고 나를 공천하는 이에게만 관심 갖게 하는 구조, 그런 제도를 바꾸는 것이 당장 드러나는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갖고 있는 문화와 체질 중에서 외향은 서구식 민주주의을 가져왔지만 실제 국민들은 왕조정치를 원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아주 뛰어나고 도덕성이 높은 지도자를 마음으로부터 흠모하며 따라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대선주자들이 세종대왕 앞에서 출마선언을 하고, 국민들은 왕을 뽑은 다음 선거 다음날부터 ‘아니다’라고 후회한다.

민주주의는 ‘불신의 제도화’다. 우리가 선거를 통해 선출한 이가 절대악당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불신으로부터 출발해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왕도정치가 ‘신뢰의 제도화’라면 민주주의는 ‘불신의 제도화’다. 인격적이고 도덕주의적인 것은 민주주의에 맞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에게 자유나 민주나 권리와 같은 개념이 일제시대 들어왔다는 것이다. 당시 유학자들이 이해못한 개념이 ‘자유’였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통의’다. 통할 통, 옳을 의, 즉 옳은 이치가 작동하는 세계에서는 자연재해도 없고 인간이 자유롭다는 얘긴데 원래 개념과는 맞지 않는다. 일제시대 자유는 친일이었고 전쟁을 거친 뒤 자유는 자유총연맹이었다.

최근 젊은이들은 오히려 고전적 의미의 자유주의자들이 아닌가 한다. 한편으로는 민족문제 있어서 의기투합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이 얘기한 자유주의가 우리나라에서 이제 막 시작되는 것 아닌가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Q2. 다시 태어난다면, (이재열 교수는) 한국에서 살겠습니까.  

저는 살겠다. 사회학자 입장에선 한국처럼 재미있는 실험장이 없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오랜 시간동안 일어난 일들이 눈 뜨면 벌어지고 사회연구자들에겐 그야말로 익사이팅한 상황이다. 이 시대에 한국사회를 연구하는 학자라는 것이 몹시 기쁘다.

Q3. 강의 중에 엘리트 카르텔의 문제를 지적했는데, 최근 벌어진 조국 법무부장관 임명과정에서 벌어진 일련의 일들이 엘리트 카르텔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청년들의 분노가 깊다. 어떻게 생각하시나.

세대와 계층계급과 불평등의 문제가 얽혀 있다고 본다. 베이비붐 세대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풍요속의 처절한 경쟁. 베이비붐 세대가 결코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는 절실한 현실이 있다. 앞서 재난 이야기를 할 때도 비슷한 표현을 했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인격주의 문화나 인맥의 끈끈함이 인간관계도 발효시켜서…결국 재난과 같이 터져나온 것 아닐까. 발효는 풍미가 좋아지다가 어느 순간 부패한다.

감기가 쉽게 폐렴으로 가지 않게 처방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문화적인 코드가 있다. 도덕주의적으로 공격하지만 도덕성과는 무관하게 정치하는 이중성이 있다. 사실 이번 이슈가 사실 모든 청년들에게 적용되는가 하는 의문이 있다. 분노는 때로는 질투일 수 있다. 소와 닭은 서로 질투하지 않는다. 오랜 기간 계층화 구조화한 영국이나 일본은 서로 질투하지 않지만, 내가 그 자리에 갈 수 있었다고 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번 사태에 대해 소위 ‘SKY 대학’부터 분노의 게이지가 가장 높고 아래로 갈수록 분노 게이지가 덜한 느낌은 그래서가 아닐까 한다.

Q4. 사익과 공익을 가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어느 지역의 보를 무너뜨리면 전체적으로는 좋지만 그 지역 사람들은 불이익을 겪는 것도 있다. 사익과 공익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공공성의 측면에서 보면 불특정 다수가 혜택을 볼 수 있는 것은 공적인 것이다. 공개돼 있고 결정과정이 투명한 것,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은 공적인 것이다. 메르스 사태 때 공공병원의 필요성이 대두됐던 건 민간병원이 긴급상황에서는 오히려 피해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비용이나 효율성 떨어지지만 공공성에 대한 정당성이 있는 것이다. 징집제를 유지하는 것, 낙도에 의료서비스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척도에 의해서 사익과 공익은 충분히 구별할 수 있다고 본다.

Q5. 불신의 사회에서 신뢰를 구축하려면 신뢰의 가치기준을 어떻게 세워야 할까.

스웨덴 사람들이 조사한 것을 보면 ‘내 월급의 절반 정도는 세금으로 내는데, 그것이 내가 모르는 낯선 사람들 위해서 쓰인다’는 사실을 아주 잘 받아들인다. 내가 어려우면 내가 모르는 낯선 사람이 내가 도울 것이라는 믿음. 굉장히 어려운 부분인데, 우리사회는 다양한 ‘신뢰’에 대한 실험과 시도가 필요하다. 같은 여가활동 방식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여가를 즐기는 사람이 신뢰도가 높다. 기호, 지향 경험들이 많아질수록 넓어지는 경향이 있다. 특히 제도에 대한 신뢰는 모든 신뢰의 기초다. 규칙을 집행하고 처벌하는 게 시스템 유지의 기본이니까. 입법 사법 행정을 못 믿고, 승복도 안 하는 제도의 신뢰는 지금 우리사회의 가장 큰 문제다.

Q6. 이른바 ‘조국 사태’로 계급론이 세대로 분출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는데, 어떻게 보시나.

이번 책에서 우리사회를 계급으로 분석한 것은 아니라서 조금 조심스럽긴 한데, 유럽의 계급구조와 한국에서의 계급구조가 다른 부분이 눈에 띈다. 우리 나라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조선시대 반상차별과 비슷하다. 젊은이들은 대부분 비정규직이지 않나. 학교에서 2년 계약직 직원을 모집하는데 연봉 2000~3000만 원에 100명 지원하는 걸 봤다. 연령은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했다. 베이비붐 세대는 상상할 수 없는 그런 것이 한국적인 특성을 만들고 있다. 또 우리나라는 자영업 규모가 아주 큰데, 이점 역시 정통적인 계급모델에 근거해 해석하고 정책을 만들면 다른 문제에 부닥친다고 본다. 한국에서 계급문제는 좀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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